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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파 살인사건 역대급 사건인 이유 (+총정리 생존자 영화 김현양 편지)

by 살구네 2020.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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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尊派

 

1990년대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연쇄살인조직

 

원래 이름은 지존파가 아니라 마스칸. 지존파는 이들을 검거한 고병천 수사과장이 지어준 이름으로,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전 훈련을 할 때 이마에 지존이라고 쓰인 두건을 두르고 훈련을 했다는 증언과, 두목인 김기환의 별명이 지존이었던 것을 바탕으로 고병천 반장이 조직원들과 합의 하에 지은 것입니다.

이들이 준 충격은 가히 엄청났으며, 천하의 공영방송 앵커들조차 이들의 범죄를 전하면서 말을 더듬으며 차마 전할 수 없다는 표현을 반복할 정도였습니다. 범죄 내용도 내용이지만 하필 사건이 공개된 시기가 추석 연휴여서 그 충격은 더 컸죠.

 

지금이야 치안이 좋아져서 상대적으로 보도가 더 자주 이루어지기에 충격이 오히려 적지만, 사건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강력범죄에 대한 보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유형의 범죄였기에 당시엔 충격이 상당히 컸고, 2020년대 기준으로 봐도 발상 자체가 상당히 엽기적인 범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사람들에게 최악의 범죄 및 살인사건을 꼽으라면 종종 거론되는 사건이기도 해요.

자신들의 범행 동기를 불평등한 사회 구조로 돌렸는데, 개인이 아닌 사회를 대상으로 한 보복성 살인이라는 것에 사회 전반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습니다. 이들은 행동강령도 있었는데 당시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어요.

 


1. 돈이 많은 자를 증오한다.
2. 10억을 모을 때까지 범행을 계속한다.
3. 배신자는 죽인다.
4.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은 4번째 강령을 어겨서 검거됩니다. 

 

 

 



지존파의 결성

 

계기는 대학입시부정사건에 분노하여,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들을 벌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지존파는 두 번 결성되었어요.

1992년 말, 김기환은 고소득자들의 돈을 갈취하고 살해하는 범죄조직을 조직할 계획을 세울 결심을 하고, 탄광 일을 할 때 알게 된 조 모 씨에게 살인을 제외한 범죄 계획을 알려주며 설득에 나섰습니다. 평소 조 씨의 경제적 여건과 성정을 알고 있던 김기환은 설득에 성공했고, 조 씨의 친구, 도박을 하며 알게 된 사람 세 명을 포섭해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하지만 그 범죄 계획에 살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조직원들이 이를 꺼려 결국 해체되었어요.

1차 조직 결성 실패 후 1993년 초, 갈 곳이 없어진 김기환은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탈퇴한 전 멤버의 소개로 가희 산장이라는 비밀 도박장에서 도박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김기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더 못 배우고 부자에 대한 증오심이 훨씬 강한 자들을 포섭하려 했고, 실패 요인을 없애기 위해 대화술 관련 서적을 읽으며 더 철저하고 견고한 조직을 만들 계획을 세웁니다.

 

그 해 3월, 고향 후배인 강동은과 접촉해 그들에게 범죄 계획의 일부를 조금씩 흘려가며 차분히 설득에 나섰습니다. 자기 의지로 가담할 수 있게 1개월이라는 유예기간도 줬습니다. 강동은이 적극적으로 찬성을 외치자 강동은의 교도소 동기인 문상록, 후배 송봉우도 동의하여 세 사람은 조직에 가입하게 됩니다.

 

 

 

 


김기환 외 세 명은 전주로 이동해 함께 생활하며 조직 결성과 범죄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강동은이 교도소 동기였던 백병옥을 떠올렸고, 당시 천안에서 막노동을 하던 백병옥을 합류시켰으며 문상록은 같은 곳에서 일했던 강문섭을 강동은에게 소개해 포섭했습니다. 이주현은 같은 해 6월, 평소 "은행강도가 되고 싶다."던 김현양을 김기환에게 소개해 조직에 합류토록 했습니다.

이렇게 조직은 그해 7월, 포커판에서 김기환을 중심으로 강동은, 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송봉우를 축으로 하여 조직되었습니다.

이미 한 번의 실패 경험이 있었기에 김기환은 조직의 유지에 굉장히 신경 썼는데, 평소 "배신한 자는 반드시 처단한다.", "잘 때 내 가슴을 열어놓고 잘 테니 나가고 싶다면 내 가슴에 칼을 꽂고 가라. 다만 그러지 못하면 지옥까지 쫓아가 죽일 것이다."라고 하는 등 조직의 기강을 흔드는 자에게 용서란 없으며, 조직에 합류한 이상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후에 김기환의 수감 후 부두목이 된 강동은이 식사 준비와 잡일 등을 시킬 여성 조직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애인이자 영광의 J주점 종업원 이경숙을 합류시켰습니다. 하지만 이경숙이 가담한 지 이틀 만에 전원 검거되었으며, 그녀는 살인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어요.

 

 

 

 

 

김기환

 

범행 당시 나이 26세, 1968년생.

 

지존파 두목입니다. 전라남도 영광군 출생. 3세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6년 내내 우등상을 받았고 반장을 해본 경험도 있었으며, 생활기록부 행동발달사항엔 지도력이 강하고 급우를 잘 통솔하나 간섭이 좀 심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할 때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크레파스를 살 돈이 없어서 안 가져갔더니 선생님이 그러면 친구들 것을 뺏어서라도 가져왔어야지!라고 혼냈다. 그래서 친구들의 준비물을 훔치기 시작했고, 그러면 선생님은 날 혼내지 않았다. 난 선생님이 가르친 대로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 라며 자신의 범죄를 남 탓으로 돌리는 등 전혀 뉘우치는 기색도 없이 뻔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운동 능력과 글짓기 실력도 우수했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다른 조직원들보다 지능적으로도 매우 우수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덕분에 집단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생활기록부 상에 준법정신이 낮은 수준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형마저 병에 걸리자, 그는 학교를 자퇴하고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부산으로 내려간 후 가장 먼저 취직한 곳은 한 신발공장이었습니다. 월급의 대부분은 어머니께 보냈고,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학업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틈틈이 검정고시 준비도 했습니다.

 

 

 

 

 

그 후 몇 년 간 대한 석탄공사에서 잡부 일을 하거나 공사판 등을 전전하며 나름 열심히 일을 했지만,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좌절한 그는 검정고시 준비도 그만두고 얼마 후에 직장도 그만둔 뒤, 영광 고향집으로 돌아와 잠시 부모 형제들과 지냈습니다. 그 와중에 도박에 빠져 도박으로 인한 빚도 지게 되었어요. 포커를 잘해서 지존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이 지존이란 별명은 조직 결성 후 부하 조직원들에 의해 두목을 대신하는 칭호로 쓰이게 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돈이 필요했던 김기환은 가진 자들을 징벌한다는 명분으로 ‘부자들의 돈을 갈취하여 살해하는 조직 결성’이라는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고, 조직 결성을 위해 각종 범죄 관련 서적은 물론이고 처세, 대화술 관련 서적을 탐독했습니다. 첫 조직 결성은 실패했으나 고향 후배 강동은 등을 끌어들여 현재 잘 알려진 멤버들로 지존파를 결성하여 두목이 되죠.

조직 결성 후 담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조직원들에게 지리산에서 일주일 간 물 한 병과 칼 한 자루로 버티도록 훈련을 시키고, 조직원들과 막노동을 해서 모은 돈으로 어머니가 기거하던 집을 살인 아지트로 개조합니다.

 

평소 그는 동네 형처럼 조직원을 대했지만 강압적인 리더십으로 조직원들을 복종케 했으며, 조직의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 첫 번째 피해자인 최미자 씨와 송봉우 살해를 주도합니다. 실제로 조직원들은 송봉우 살해 당시 두목인 김기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잔혹하게 살인 행위를 했다고 해요.

 

 

 

 


아지트 완공을 얼마 앞두고 실전에 돌입하기 전인 1994년 6월 17일 김현양의 생일날 조직원들과 술을 마신 후, 밤 중에 불현듯 아는 선배의 집에 보일러 수리를 하러 가겠다며 자리를 비운 김기환은 선배의 집에서 자고 있던 선배의 중학교 1학년 조카를 성폭행해 체포됩니다.

 

이때 김기환은 범행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는데, 전문가들은 김기환이 직접적인 범행으로부터 손을 떼고 중죄를 면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했습니다. 강간치상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김기환은, 수감된 후에도 강동은을 부두목으로 임명해 부하 조직원들에게 범행을 지시했어요. 수감되어 있는 중에도 그의 말은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법이었습니다.

후에 지존파 전원이 검거되어 서울구치소로 이전된 뒤, 1995년에 사형이 확정됩니다. 지존파 관련 사진이나 영상에서 두목 김기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든데, 김기환은 지존파가 검거되기 3개월 전부터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존파 사건으로 기소된 후, 구치소 수감생활 중 종교를 천주교로 귀의하였다고 해요.

 

1995년 11월 2일. 전원 검거 및 구속된 지 불과 1년도 채 안되어 대규모 사형집행이 이뤄졌고, 명단에 지존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직 검거 며칠 전 식사조리 및 대접 등 을 목적으로 영입한 조직원 강동은의 여자 친구인 이경숙을 제외, 6명 모두 교수형으로 사형 집행되었습니다.

 

 

 

 


김기환을 포함하여 사형이 집행된 지존파 조직원들은 대부분의 유가족들이 시신 인계를 거부하여, 이를 알게 된 그들을 검거한 고병천 전 강력 수사반장이 대신 인수하였고 시신 화장 후 아내와 함께 지존파들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고 합니다.

두목 김기환은 7시 35분에 이끌려왔는데요. 최후로 할 말이 있는가라고 묻자, “죄인이 할 말은 없으나 남자는 자기가 한 말은 끝까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회개하기보다는 자기가 했던 말을 합리화하려는 것 같았죠. 그 후 냉소하는 듯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고.

 

그러나 마지막에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머니께 내가 새 인생을 걷는다고 전해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7시 55분에 집행됐고, 8시 8분에 절명했습니다. 사형이 집행된 후, 이하 조직원들과 함께 전원 시신 화장되어 그의 시신 역시 사형수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강동은

 

검거 당시 나이 21세, 1973년생.

 

부두목입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했으며 특수절도, 폭력 전과 2범이에요. 김기환의 국민학교, 중학교 후배였습니다.다른 조직원들과는 달리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넉넉한 가정형편은 아니었고 형제가 많아 부모님의 관심을 받지 못했어요. 학창 시절부터 폭력적인 성향이 짙어 급우들을 자주 폭행했고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생활기록부 상에는 매사에 무관심한 성향, 바른생활이 요구됨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동창인 문상록과 함께 이웃집의 벼 두 가마니를 훔쳤다가 절도 전과를 갖게 돼요. 밴드부에 가입해 음악에 취미를 붙여보려고도 했으나, 선배들의 가혹행위가 심해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방황하다가 결국 문상록과 가출해 상경한 후 막노동을 시작했습니다.

 

전과 삭제를 위해 4년 간 열심히 일해 모은 돈 1500만 원을 변호사에게 주었다가 돈만 날렸을 뿐 여의치 않자 ,그때부터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이 생겼습니다.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지 않자 귀향해 도박에 빠졌다가 김기환을 만나 조직에 합류하게 됩니다. 김기환에게 충성을 보이며 문상록, 백병옥, 강문섭 등을 소개하는 등 초반에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두목인 김기환이 강간치상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자 부두목으로 임명되어 수감 중인 김기환을 수 차례 면회해 범행 지시를 받았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폭력적인 성향이 짙었고 조직의 부두목이 되기도 하는 등 겉보기엔 범행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비치지만, 사실 소심해 거의 김기환으로부터 범행을 지시받아 나머지 조직원들이 실행하도록 전달하는 역할만 하고 범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첫 피해자였던 최 씨 살해 후엔 죄책감에 시달려 다리 부상을 핑계로 잠시 혼자 지내기도 했고, 소 씨 부부 살해 당시에도 지시만 하고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지존파가 체포되기 며칠 전 잡일과 요리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단 명목으로, 자신의 여자 친구 이경숙이 일하던 주점에 진 빚을 대신 갚아준 후 이경숙을 지존파의 일원으로 들입니다.

 

그렇게 이경숙이 조직에 합류한 지 이틀째 되던 날, 아침에 찬거리를 사러 트럭을 타고 아지트를 나섰다가 미행하고 있던 경찰과 1.5km 추격전을 벌인 후 조직원들 중 제일 먼저 체포되었습니다. 1995년 11월 2일 대규모 사형집행이 이뤄졌고, 명단에 포함되어 일곱 번째로 사형이 집행되었어요.

 

오전 10시 20분에 들어 사형장 입회하였습니다. 몸은 약간 떨었으나 그래도 비교적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들어왔다고 합니다. 인정심문 후 신앙고백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사형 집행된 후, 이하 조직원들과 함께 전원 시신 화장되어 그의 시신 역시 사형수 공동묘지에 묻혔어요.

 

 

 

 

 

김현양

 

검거 당시 나이 22세, 1972년 6월 17일생.

행동대장. 중학교 2학년을 중퇴했고 상해 전과 1범입니다. 김기환과 조직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인물이에요. 상해 1범이라는 전과도 조직 가담 후에 생긴 전과입니다.

검거 당시 입대를 앞두고 있던 남동생과 미성년자던 여동생이 있었으며, 12세에 중국집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간암으로 사망하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했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식당 일을 시작했어요. 어머니가 식당 일을 하면서 여러 남성과 은밀한 만남을 이어나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하교 후 귀가하는 걸 꺼릴 정도로 심리적인 방황을 했습니다.

 

생활기록부의 행동발달사항에는 무기력하며 학업에 관심이 없음, 주의가 산만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지 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현양의 학창 시절 담임 선생님들은 모두 입을 모아 김현양에 대해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고 해요.

 

이처럼 학창 시절엔 심리적인 방황에도 폭력적인 성향이 보이지 않았고, 큰 문제도 없어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친구와 재혼하자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 증오심은 커지기만 했고 이는 일종의 여성 혐오로 변모하게 되었어요.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다툰 후 가출하여 광주로 올라갔는데, 첫날부터 걸인들에게 잘못 걸려 앵벌이를 하게 됩니다. 껌팔이, 절도 등을 하며 도주할 기회만 엿보다 도주에 성공해 서울로 상경한 뒤, 신문팔이부터 시작해서 지역을 옮겨 다니며 정착하지 못한 채 제화점 직공, 술집 웨이터 등을 전전해요. 그러던 중 전기기술을 배워 취직해 몇 년 간 모은 돈으로 트럭을 구입해 굴비 장사를 시작했으나 실패합니다.

 

장사를 접고 운수회사에 취직했지만 취직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다른 이로부터 김기환을 소개받고 조직에 가담하게 됩니다. 조직에 합류한 뒤 내재돼있던 강한 폭력성을 드러내며 두목인 김기환과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고, 행동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행동 대장답게 모든 범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체포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태연히 웃어 보이며 당당하다 못해 충격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어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했습니다. 오히려 두목인 김기환보다 언론에 훨씬 많이 노출되었는데, 그 이유는 마치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무서울 것도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었고 이로 인해 지존파 조직원들 중 얼굴이 가장 잘 알려져 있죠.

지존파 조직원 중 유일하게 인육을 먹었다고 발언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인육을 먹은 이유는 인간이길 포기하려고. 그러나 끔찍한 범행을 자행하면서도, 양수리 부근에서 세 번째 피해자 이 씨와 함께 납치된 이 모 씨를 유일하게 살려주며 탈출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다만 일부러 탈출의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인지, 단순히 이 씨를 너무 믿어서 방심한 것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김현양이 구치소에 수감된 후, 면회를 와 일부러 살려준 거냐고 묻던 이 씨의 질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닙니다." 라고 대답하며 일부러 기회를 주었다는 뉘앙스는 아니었으나, 신고한 이 씨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들이 저지른 범행에 대해 사과했다고 합니다.

 

 

 

 

 

평소 이 씨에게 호의적으로 대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나 동생들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고, "사랑하는 여자랑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그러면 나머지 애들한테 우리 가족이 개죽음당할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해요.

그는 수감생활 중, 가장 먼저 개신교로 개종하고 참회하였으며 전도 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사형집행 몇 달 전부터 몸이 안 좋아져 병동 입실 생활을 했어요. 어떻게 됐든, 결국 1995년 11월 2일 대규모 사형집행이 이뤄졌고 명단에 포함되어 두목인 김기환 다음으로 사형장에 입회하였습니다. 몸을 많이 떨고 안절부절못했다고 합니다.

인정심문을 받고 사형장 내에서 마지막 전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른 뒤, 오전 8시 15분에 집행을 시도하였으나 밧줄 한 가닥이 끊기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은 시간인 8시 25분에 형이 집행되었고 10분 뒤 절명하였다고 해요.

사형 집행 당일 전까지 그는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약속까지 하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당일 사형집행 직전에 번복하였다고 합니다. 사형 집행된 후, 이하 조직원들과 함께 전원 일괄 시신 화장되어 그의 시신 역시 사형수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문상록

 

검거 당시 나이 23세, 1971년생.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특수절도 등 전과 3범입니다. 고등학교 재학 중 친형과 아버지가 사망한 후,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던 강동은과 함께 가출해 막노동판을 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생활기록부에 학습에 흥미가 없고 우발적 행위가 우려되며 자기 억제를 못함이라는 지적이 있어요. 평소 충동조절장애로 의심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991년 입대했지만 같은 해 12월 의가사 제대를 한 후, 술집 웨이터 같은 잡일을 하다가 강동은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출소 후 조직에 가담해 첫 피해자였던 최 씨 살해를 제외하곤 모든 범행에 참여했습니다. 조직 내에선 조직의 부두목이었던 강동은을 보좌하는 역할이었어요.

 

김기환 다음으로 연장자였지만 서열은 강동은, 김현양 아래였기 때문에 범죄 행위 시 그다지 주도적인 역할은 맡지 못했으나 김현양이나 김기환 못지않은 잔인한 성향의 소유자로, 범행시 살인 행위 자체나 피해자들의 고통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김기환에게 절대적 충성을 보였고,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 모 씨를 처음부터 끝까지 못마땅해했습니다.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고 하던 조직행동강령을 어기며 이 씨를 살려주려 한 김현양과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고 주먹 다툼까지 벌였다고 해요.

 

1995년 11월 2일 , 대규모 사형집행이 이뤄졌습니다. 당시 서울구치소에서 집행된 15명의 사형수 중 14번째로 오후 3시 15분경에 사형장에 입회하여 인정심문을 받고, 천주교 미사를 마지막으로 집전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어요.

교수대 밑으로 사라진 후 10분 후인 3시 25분에 절명했습니다. 문상록의 사형 집행 후, 시신 인수를 가족들이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인이 가담한 지존파를 검거한 고병천 전 강력 수사반장과 그의 아내가 대신 인계하여 장례를 치러주었고,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화장되어 사형수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강문섭

 

검거 당시 나이 20세, 1974년생.

 

고등학교를 중퇴했습니다. 맨 나중에 합류한 막내 조직원이며, 유일하게 전과가 없어요.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고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양쪽 얼굴에 큰 화상 흉터가 있는데, 이 때문인지 학창 시절 늘 침울하고 무기력했으며 주의가 산만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장기 결석으로 제적당한 후,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술집 웨이터 일 등을 하다가 알게 된 문상록의 소개로 강동은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거금을 쥐어주겠다던 김기환의 말에 현혹되어 조직에 가담하게 됩니다. 검거 후 범행 동기가 자신의 얼굴에 난 화상흉터를 없애기 위한 성형수술 자금 마련이라고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조직 내에선 백병옥과 함께 서열 최하위로 범행에 있어서 주도적인 행위는 하지 않고 주로 뒤처리를 담당했어요. 1995년 11월 2일 대규모 사형집행 당시 명단에 포함되어 오후 2시 29분에 13번째 순서로 교도관들로부터 양 팔을 부축받으며 사형장에 입회했습니다.

 

인정심문 후 교도소장과 목사 및 교도관들 등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고, 찬송가를 불렀으며 작별 인사 후 오후 2시 52분에 밧줄이 목에 걸쳐진 채로 휘장 속으로 끌려 들어가 오후 3시 1분에 절명했습니다. 사형 집행된 후 이하 조직원들과 함께 전원 일괄 시신 화장되어, 그의 시신 역시 사형수 공동묘지에 묻혔어요.

 

 

 

 


백병옥

 

검거 당시 나이 20세, 1974년생.

 

특수강도 등 2범. 다른 지존파 조직원과는 달리 부모 양쪽이 온전하게 있었으며,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것도 아니나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부모가 품팔이를 하여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해요. 지존파에 가입해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서라고 밝혔습니다.

마지막 공판에 지존파의 부모 중 유일하게 백병옥의 부모만이 참석했는데, 허름한 차림을 하고 있었고 여관에 묵을 돈이 없어 대합실에서 잤다고 합니다. 그의 부모는 가난을 물려준 자신들을 탓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해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판사에게 작성한 탄원서는 묻은 눈물로 인해 탄원서 종이가 모두 흐려져 글이 안 보일 정도였다고. 또한, 그의 친모는 자신의 아들이 사람을 죽이고 그런 짓을 할 애가 아닌데 사람을 잘못 만나게 되어 이런 짓을 하였다며 끝까지 판사에게 선처와 용서를 구했으나, 직후 검사의 사형 구형에 백병옥의 어머니는 거의 실신 정도까지 갈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본인은 효도하기 위해 범죄를 했다지만 도리어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죠.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해 초등학교 재학 중 장기 결석으로 이미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몸이 더럽다는 이유로 선생님이 발가벗긴 이후 학교가 아예 싫어졌다고 합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장기 결석으로 제적 당해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절도 및 강도 전과마저 생겼습니다.

 

 

 

 


특수강도로 수감되어 있을 때 교도소 동기였던 강동은과 친분을 맺어, 출소 후 함께 공사장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천안에서 막노동을 하던 중, 김기환과 함께 범행 모의를 하던 강동은으로부터 일확천금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조직 가입을 권유받아 조직의 일원이 돼요. 조직 내에서 맡은 역할은 범죄 대상을 물색하는 것이었습니다. 막내였기 때문에 서열은 최하위였지만, 선배들 못지않은 잔악함을 보였고 두목인 김기환에게 절대복종했습니다.

백병옥은 당일 오후 3시 28분 서울 구치소 내에서 사형 집행된 사형수 중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15번째로 사형장에 입회하였습니다. 당시 법적으로 나이가 제일 어려서인지 가장 마지막에 사형당했는데, 관계자 인터뷰 당시 말로는 백병옥이 마지막으로 사형장에 입회했을 당시 두려움에 몸을 하도 떨어서 "얘야, 왜 그렇게 떠느냐? 별로 안 걸릴 거야. 금방 끝날 거야. 예수님도 사형수였다." 라고 말하며 그의 마음을 안정시켰다고 합니다.

백병옥은 유독 말수가 적었는데, 그 역시도 수감생활 중 기독교에 귀의함과 더불어 열심히 많은 재소자들을 전도했다고 해요. 부소장으로부터 인정심문받고 예배를 한 그는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은 후, 설교받으며 축도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마치자마자 머리에 흰 용수가 씌어진 그는 목에 밧줄이 걸린 후 재빠르게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목사를 포함한 교도소 관계자들 일부는 백병옥이 휘장 밑으로 사라질 때까지 찬송가를 끝까지 불렀다고 합니다.이하 조직원들과 함께 전원 일괄 시신 화장되어 그의 시신 역시 사형수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이경숙

 

검거 당시 나이 23세, 1971년생.

강동은의 애인이자 절도 전과 1범.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 다방을 운영하던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났고 모 여중 2학년을 중퇴, 가출했습니다. 1992년까지 대전에서 일하다가 영광으로 내려와 어느 작은 주점에서 접대부 생활을 시작했고, 그러던 중 주점을 찾았던 강동은과 인연을 맺어 연인이 되었습니다.

 

강동은이 엄청난 범죄에 연루되어 있단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함구했으며, 인질이었던 이 씨가 탈출하자 강동은이 잡일과 요리를 해줄 여성 조직원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주점 사장에게 진 빚 1600만 원을 대신 갚아주어 풀려난 뒤 합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합류한 지 이틀 만에 검거되었고 직접적으로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됨에 따라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1998년 석방되었습니다.

 

검거 당시 강동은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어요. 강동은을 비롯한 지존파 일당들이 최종 사형 판결을 받자, 믿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옆에 있던 관계자에게 정말이냐고 재차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송봉우 

 

사망 당시 나이 18세, 1975년생.

 

이름이 송봉은으로 알려진 이유는 생전에 형의 주민등록증을 빌려 도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라남도 영광군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조직에 합류하게 됩니다. 1993년 7월 초순 밤, 강동은, 백병옥 등과 함께 범행 모의를 하다가 홀로 걸어가던 최미자 양을 발견하고 인근의 다리 밑으로 끌고 가 집단 강간하는데요.

 

그 후 최 양의 처분을 두고 강동은 등과 함께 고민하다가, 강동은이 김기환에게 상황을 보고 하면서 김기환, 김현양 등의 합류 후 살해지시를 받아 살해 과정에 동참하게 됩니다. 자신의 몹쓸 짓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는지 꿈에 귀신이 나온다며 한동안 괴로워하다가 1993년 8월, 조직의 자금 통장에서 300만 원을 빼내 도주하던 중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용서해주겠다며 단합대회 겸 개나 잡아먹으러 가자고 회유하는 조직원들에게 속아 인근 야산으로 유인당해, 곡괭이 등으로 폭행당한 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이 훼손된 채 사망, 불에 태워진 뒤 암매장 당합니다.

 

 

 

 


첫 번째 범행

 

1993년 7월 초순 밤, 11시경 충청남도 계룡시 계룡역 부근. 송봉우, 강동은, 백병옥은 한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다가 퇴근 후 홀로 걸어가던 23세 은행원 최미자 씨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최 씨를 다리 밑으로 끌고 가 성폭행했는데, 계획에 없던 범죄를 저지르고 난 후 고민하다가 강동은이 숙소에 있던 김기환에게 상황을 보고 합니다.

 

김기환은 얼굴을 보인 이상 살려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살해할 결심을 하죠. 김기환은 포터를 몰고 김현양, 강문섭과 함께 현장으로 갔고, 최 씨를 차에 싣고 숙소에서 삽을 챙긴 뒤 논산의 한 야산으로 이동합니다. 김기환은 현장에 도착해 최 씨를 강간하고 김현양에게도 강간하도록 지시한 뒤, 사람 죽이는 시범을 보여준다며 최 씨를 목졸라 살해했습니다.

 

그 와중에 증거 인멸하는 방법까지 가르치고, 조직원들이 교대로 구덩이를 파도록 지시해 최 씨를 암매장했어요. 그렇게 그들은 살인 연습을 했고 최미자 씨는 첫 피해자가 됐습니다.

조직원들은 호기롭게 조직에 들어왔지만 막상 살인을 저지르고 나니 흔들리기 시작해요. 특히 최미자 씨 살해의 원인 제공자이자 최연소 조직원이었던 송봉우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악몽으로 괴로워합니다. 이를 견디다 못해 조직을 이탈하기로 결심한 그는 1993년 8월, 조직의 자금을 모아둔 통장에서 현금 300만 원을 인출해 도주해요.

 

 

 

 

 

김기환은 송봉우가 도주한 지 두 시간 만에 사태를 파악하고, 조직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송봉우를 살해하기로 합니다. 김기환은 조직원들과 송봉우 체포 작전을 세운 뒤, 송봉우의 누이로부터 송봉우가 거주하고 있는 집 주소를 얻어낸 후 송봉우에게 용서해주겠다며 조직에 다시 합류할 것을 설득합니다. 마음이 약해진 송봉우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조직으로 복귀하죠.

 

조직원들은 송봉우에게 개를 잡아먹고 단합 대회를 한다며 한 야산으로 유인합니다. 송봉우가 장소에 도착하자 김기환이 책임 추궁을 하기 시작했고, 용서를 빌던 송봉우의 뒤통수를 김현양이 벽돌로 후려쳐 기절시킨 뒤 나머지 조직원들은 미리 준비한 곡괭이 등으로 송봉우를 폭행했습니다.

 

다만 첫 범행 때와는 달리 김기환이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아도 두목에게 잘 보이기 위해 조직원들은 알아서, 경쟁적으로 살해 행위를 했고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을 불에 태운 뒤 암매장까지 합니다. 이들은 조직을 이탈하면 어떻게 되는지 목격했기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첫 살해 당시 느꼈던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고 죄책감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송봉우 살해 후 태연히 개를 잡아먹었고, 김기환은 추후 법정에서 송봉우 살해에 대한 진술을 할 때 하루에 개 두 마리를 잡은 것에 불과하다고 발언해 장내를 술렁이게 했습니다.

 

 

 

 


그 후, 이들은 본격적인 범행에 착수하기 위해 당분간 아지트 건설을 목표로 돈을 모으는 데에만 전념하기로 합니다. 이들은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대전 일대에서 막노동을 해 모은 돈으로 김기환의 어머니의 집을 차근차근 살인을 위한 아지트로 개조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김기환은 가족들과 이웃에게 어머니께 효도하기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살 집을 새로 짓는다고 말합니다.

 

그들과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젊은 청년들이 성실하게 일한다며 흐뭇해했습니다. 설마 그들이 등 뒤로 그런 끔찍한 범행을 모의하고 있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죠. 1994년 6월 중순 김현양의 생일날, 김기환은 김현양에게 생일 파티를 열어준다며 조직원들과 모처럼 회식을 합니다.

 

그러던 중 불현듯 아는 선배의 집 보일러 수리를 해준다며 자리를 비웠다가 선배의 집에서 잠자고 있던 선배의 여중생 조카를 강간해 구속돼요. 두목의 부재에 강동은이 부두목이 되어 조직을 이끌게 됩니다. 아지트 완공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중심을 잡아줄 두목이 없자, 이들은 지옥 훈련을 받기로 합니다.

 

7월 중 일주일 가량을 지리산에서 칼 한 자루와 생수 한 병으로만 버티기로 한 겁니다. 강동은은 뒤쳐지는 조직원이 있으면 너도 봉은이처럼 잔디 이불 덮고 싶냐며 채찍질했다고 해요.

 

 

 

 


아지트의 완공 


1994년 7월 말, 살인을 위한 그들의 아지트가 완공되었습니다. 아지트 완공 전까지는 주민들의 접근을 막았다가, 아지트가 완공되자 그들은 태연히 이웃 주민들을 초대해 집들이를 했습니다. 이들의 아지트는 요새처럼 아주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었어요. 의심을 피하기 위해 건물 외벽에 분홍색 페인트까지 칠하고 일반 가정집처럼 해 놨지만, 지하에는 무려 3천만 원을 들여 희생자들을 납치하고 감금해 둘 감금 시설과 시체를 소각하는 소각장을 만들었습니다.

아지트 완공과 동시에 조직원들은 김현양의 중학교 후배인 무기 중개인 이주현 씨로부터 무기를 구입해 범행 도구들을 완비합니다. 또, 범행 대상 물색을 위해 前 현대백화점 신용 판매부 직원이었던 김민경 씨로부터 백화점 고액 거래자 명단을 구입해요. 물론 지존파가 살인극에 쓸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넘겨 주지는 않았겠지만 개인 정보 유출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악의 사례이기도 합니다.

 

준비가 다 되었다고 판단한 강동은은 김기환을 면회해 본격적인 범행에 착수할 것을 허락받아요. 조직원들은 평소 김기환이 말했던 대로 벤츠나 그랜저 등의 고급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1994년 9월 5일 오전 12시경, 아지트를 떠나 서울로 출발한 뒤, 당일 밤 서울 워커힐 호텔 부근에서 1박을 하고 7일에 범행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갑니다. 범행 실패 후, 바로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낚시터 부근으로 장소를 옮겨 차를 주차한 뒤 도로 밑에서 범행대상이 나타날 때까지 잠복합니다.

 

 

 

 

 

몇 시간 뒤 도로에 그랜저가 나타나자 강동은이 승용차로 그랜저 차량을 가로막았고, 나머지 조직원들이 가스총과 칼 등으로 그 안에 타고 있던 이종원 씨(36세, 남)와 이모 씨(27세, 여)를 위협해 밖으로 끌어냅니다. 테이프와 끈으로 두 사람의 손과 발을 결박하고 눈을 가린 채로 포터에 실어 아지트로 납치해요.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두 인질의 인적 사항 등을 취조했는데 둘 다 자신들이 원하던 부자들이 아닌 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이종원 씨는 카페 악사였고, 조수석에 타고 있다가 함께 납치된 이모 씨도 이종원 씨와 같은 카페에서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습니다. 조직원들끼리 둘의 처분을 놓고 토론을 하다가 둘 다 살해하기로 해요.

다음 날 조직원들이 돌아가며 이 모 씨를 성폭행했고, 이종원 씨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한 뒤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사시키고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할 계획을 세웁니다.

 

여자도 함께 죽이면 수상해 보일 수 있다는 논리로 이 모 씨도 함께 살해하려고 했던 다른 조직원들을 설득시킨 김현양이 이 씨를 살려주는 대신, 이 씨에게 공범 의식을 심어 줌으로써 이 씨가 다른 조직원들로부터 신임을 얻을 수 있도록 이종원 씨 살해 과정에 동참하도록 유도합니다. 이 씨는 극한의 공포에 떨며 이종원 씨의 입을 막는 시늉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 이종원 씨를 넣은 골프백을 들고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교동리의 한 인적이 드문 도로로 이동합니다. 이때 얼굴에 화상 흉터가 있어 경찰에게 잡혔을 때 눈에 띌 확률이 높은 강문섭과 이모 씨만 아지트에 남아 강문섭이 저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형들이 시켜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이모 씨를 성폭행합니다.

 

하지만 이때까지 이종원 씨는 살아있었고, 이를 확인한 조직원들이 전기충격기로 재차 충격을 줘 살해해요. 그 뒤 이종원 씨를 그랜저 운전석에 태우고 차량을 계곡으로 밀어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처럼 위장합니다. 더 치밀하게 위장하기 위해 도로에 스키드 마크까지 남겼습니다. 범행을 마친 후 아지트로 복귀한 그들은 이 씨를 또 한 차례 성폭행합니다.

1994년 9월 13일, 경기 성남시 남서울공원묘지 근처에 주차된 그랜저 차량을 발견하고는 성묘를 하던 소윤오(43세, 남), 박미자(35세, 여) 부부에게 차량 바퀴에 펑크가 난 것 같다며 부부가 그 차량의 소유주임을 확인하고, 공기총을 발사해 위협한 뒤 이전 범행 때와 유사한 방법으로 부부를 납치해 아지트로 이동합니다.

 

14일 새벽, 피해자들을 취조해 보니 이전 피해자들과는 달리 소 씨는 자수성가한 중소기업 사장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되자 몸값을 지불하면 풀어주겠다는 말로 회유합니다. 조직원들은 소 씨 부부의 몸값으로 1억 원을 요구했고, 소 씨로 하여금 회사 직원에게 교통사고가 크게 났는데 피해자에게 1억 원을 지불해 합의를 보기로 했다고 거짓말해서 돈을 건네받도록 지시해요.

 

 

 

 

 

소 씨로부터 1억 원까진 지불할 수 없지만 8천만 원까진 된다는 확답을 받은 뒤, 같은 날 오전 광천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합니다. 경찰에게 범죄가 발각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차량에 다이너마이트도 구비해 놓았는데, 김현양이 다이너마이트 조작을 잘못하여 손과 발에 부상을 입고 아지트로 복귀합니다. 오후 2시경, 조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 씨는 회사의 총무 부장으로부터 8천만 원이 든 돈가방을 건네받습니다.

 

이때 남편 소윤오는 도주 하거나 구조 신호를 보낼 수도 있었으나 아내 박미자가 인질로 잡혀있었고, 또 당시에는 돈만 지불하면 정말 풀어주리라 믿었기에 돈만 받아옵니다. 돈가방을 받고 아지트로 복귀한 그들은 그날 밤, 처음 만져보는 큰돈에 기쁨에 취해 소 씨 부부의 처분을 놓고 토론을 합니다. 살려 주자, 죽이자는 의견이 반으로 나뉜 적도 있으나 원칙대로 죽여야 한다는 의견으로 모아져 부부를 살해하기로 해요.


이들은 부부에게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며 술을 먹여 물리적으로 저항하지 못할 때까지 취하게 한 뒤, 이 씨를 확실하게 범죄에 가담시킬 목적으로 총을 발사하여 소 씨를 멸살하도록 지시합니다. 김현양이 소 씨를, 강문섭이 박 씨를 맡아 시신을 해체했고 나머지 조직원들은 이모 씨가 고개를 돌리고 있자 조직원 중 일부가 이모 씨의 머리를 잡으며 죽기 싫으면 봐라는 말과 함께 강제로 이 끔찍한 광경을 보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현양은 사체의 일부를 도려내어 먹는 기행을 보입니다. 이때 김현양이 이모 씨에게 사람 고기 처음 보죠? 맛있어요 라며 인육을 건넸지만 이모 씨는 거절해요. 절단한 사체를 소각하는 과정이 오래 걸려 3개 조로 편성까지 했습니다. 이들은 사체를 소각할 때 나는 냄새를 희석시키기 위해 마당에서 일부러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이웃 주민들에게 구운 고기를 나눠주는 태연함과 치밀함을 보입니다.

이들은 소 씨로부터 빼앗은 8천만 원 중 일부를 1500만 원 상당의 기관총 2자루를 청계천에서 구입, 포터 냉동 탑차를 비롯해 갤로퍼, 소나타를 다른 사람의 명의로 구입할 계획을 세울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가 전지훈련을 받은 후 최후에 두목 김기환을 체포한 영광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관들을 죽이고 총기를 탈취하여 MBC를 습격할 계획을 꾸밉니다.

 

 

 

 


지존파의 체포

 

양수리 부근에서 세 번째 희생자 이 씨와 드라이브를 하다 함께 납치된 카페 여종업원 이모 씨(당시 27세)의 극적인 탈출로 인해 지존파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씨는 납치되었을 당시 지존파의 아지트에 감금된 후, 살려 달라고 애원해도 살려주지 않을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가 처음 잡혀왔을 때 김현양이 당신이 이제부터 우리가 하라는 대로 따르면 우리는 당신을 살려줄 것이고 아니면 죽일 것이라고 했을 때도, 이미 그녀는 자신들이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기에 어이가 없어서 픽 웃어버렸는데 이런 그녀의 반응에 김현양은 당황했다고 해요.

그러나 김현양이 이 씨에게 연정을 품게 되어, 이 씨를 죽이려는 조직원들을 설득시키면서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 목숨은 부지하게 됐으나 입막음용으로 살인에 가담할 것을 강요받은 이 씨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지인이었던 이 씨, 중소기업 사장 부부를 죽이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죠.

 

마지막에 억지로 조직원들이 이 모 씨의 손을 갖다 대는 식으로 동참시키려 했으나, 이것은 범행에 가담한 것이 아닌 또 다른 피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차례의 범행 현장에 있음으로 문상록을 제외한 지존파 조직원들에게 얼추 신임을 얻었으나, 그녀를 끝까지 믿지 못했던 문상록이 김현양과 심하게 갈등을 빚으며 언제든 지존파에게 희생될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 씨의 탈출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다이너마이트를 잘못 다뤄 손과 발에 부상을 입었던 김현양이 실밥을 풀고 상처 부위에 소독을 받는 날, 이 씨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김현양에게 병원에 동행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김현양은 흔쾌히 그러자고 답했고 이 씨는 그와 동행하는 데 성공해요.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던 중, 김현양은 현금 50만 원이 든 지갑과 휴대폰을 이 씨에게 맡기고 진료실로 들어갑니다.

생존 피해자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김현양은 피해자를 일부러 살려 주려는 듯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습니다. 처음 같이 병원을 가자는 피해자의 말을 애써 무시하고는 두 번째에 대답했으며, 조직원들이 걔는 왜 데리고 가느냐고 묻자, 자신이 책임진다고 했습니다. 또한 90년대 초반에 50만 원이라는 돈은 병원에 갈 때 갖고 가기엔 큰돈이었으며, 휴대폰까지 챙겨갔습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는 제가 언제 당신 같은 여자 옆에 태우고 드라이브 가겠습니까? 오늘 나온 김에 노래방도 갑시다라는 말을 했고, 이 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병원에 도착해서는 이 씨에게 도망치고 싶죠? 탈출하고 싶죠?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가도 돼요라고 말했다고 언급했어요.

 

그리고 인질로 붙잡힌 상대를 아무리 믿는다 한들, 거금의 돈이 든 지갑과 휴대폰을 둘 다 맡기고 진료를 받으러 들어가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인질범의 정상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이 씨는 예상보다 빨리 탈출의 기회가 주어지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은 건 마찬가지인데, 이왕 죽을 바에야 달아나서 이 사건을 알리는 데 조금이라도 노력하여 피해자 분들에게 속죄하겠다는 심정으로 병원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습니다. 지존파의 행동반경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택시 기사에게 해남경찰서로 가 달라고 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하차하고 포도밭 인근의 농가에 숨어듭니다.

 

비닐하우스 안 평상 밑에 몇 시간을 숨어있던 이 씨는 집주인 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집주인 지인의 차를 얻어 타 대전까지 이동해요. 대전 톨게이트에서 택시를 잡아 서울의 한 모텔에 도착한 뒤, 자신이 일하던 카페에 연락을 해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이 씨는 서초서에 카페 주인의 남동생과 동행하여 사건에 대한 얘기를 꺼냈으나, 경찰들은 관할이 아니라며 사건 담당을 거부합니다. 분노와 공포가 극에 달한 이 씨를 보던 카페 주인의 남동생은 평소 카페를 즐겨 찾던 고병천 반장에게 연락을 해요.

강력반장이었던 고병천 반장조차 이 씨의 진술이 충격적이어서 처음엔 믿지 못했으나, 이 씨가 소윤오 부부 실종, 납치 사건에 대해 아는 듯한 말을 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이 씨가 지니고 있던 휴대폰이 이 씨가 진술한 지존파의 일원 강동은의 것으로 확인되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게 됩니다.

 

 

 

 

체포 작전은 수월했습니다. 먼저 강동은이 이른 아침 포터를 타고 마을로 가다가 경찰의 미행을 눈치채고 경찰과 1.5km 추격전 끝에 검거되었고, 경찰이 강동은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걸어 김현양과 이경숙, 문상록을 유인해냅니다. 경찰이 파 놓은 함정임을 눈치챈 문상록이 도주하다 형사에게 제압당하고 김현양, 이경숙은 르망을 타고 도주하려다가 20km 추격 끝에 검거됩니다.

 

나머지 조직원들은 아지트에 있다가 아지트를 급습한 경찰들에 의해 모두 검거돼요. 이 씨의 탈출 후, 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아지트를 떴으면 검거되지 못했거나 검거되더라도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테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 씨가 탈출했음에도 아지트에 남아있던 이유는, 이 씨의 탈출 성공 후 그들이 영광 파출소 앞에 잠복해 경찰들의 동태를 살폈으나 평소와 같아 이 씨가 신고하지 않은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인데요. 멀리 서울까지 달아나서 신고한 이 씨의 기지가 발휘된 부분입니다. 또 이 씨가 범행에 가담했기 때문에 쉽사리 신고하지 못할 거라 믿은 것도 있습니다.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고 거창하게 강령까지 내세워 놓곤 결국 이걸 안 지켜서 붙잡힌 꼴이죠. 실제로 검거 후 체포 경위를 들은 김기환이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고 했는데, 바보 같은 놈들이라며 질타했다고 합니다.

현재도 큰 차이 없지만 당시에는 중 범법자는 검거 즉시 신상공개를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으므로, 범인 체포 후 얼굴이 그대로 나왔고 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돈 없다고 무시하는 것들. 압구정동 야타족들! 모조리 죽이지 못한 게 한이다! 라는 식으로 사회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중국에 가서 전지훈련을 하려 했었고, 야인이나 뺑끼통과 같은 책을 교재로 삼았다고 자랑했습니다. 더 나아가 압구정 야타족과 백화점 고객 등 돈 많은 이들을 살해하고, 심지어는 경기도 일대 러브호텔까지 쓸어버리려고 했다는 미친 소리까지 했는데요. 백화점 우수 고객 1200명 명단 리스트가 지존파 손에 들어간 것이 확인되자, 우수 고객들이 백화점 측에 항의하여 백화점 상담 전화가 마비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김현양은 자랑스럽게 인육을 맛봤다고 했고, 왜 식인을 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이길 포기하기 위해서라고 황당무계한 궤변을 지껄이는 등 반성의 기미는 눈 씻고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없었습니다. 살인의 이유를 불평등한 사회 모순 때문이라며 사회 탓으로 돌리고 자신들의 가치 전도 현상을 정당화하려 했죠.

 

김현양은 체포되어 끌려갈 때 "2천만 원 이상의 자동차를 가진 놈들은 다 죽여야 해! 그래야 내 원한이 풀려!" 라고 소리를 쳤다고 주민들이 증언했으며, 이들은 현장 검증에선 잘난 놈들을 죽이려 했다고 거듭 말했습니다.

당시 경찰이 지존파로부터 압수한 무기는 다이너마이트 23개, 뇌관 14개, 망원렌즈가 달린 공기총 1정, 가스총 1정, 등산용 지팡이로 위장한 대검 7개, 대검 4개, 전자 충격기 1개, 전자봉 1개, 무전기 2대, 호출기 5개 등이었습니다.

 

 

 

 


지존파의 처벌

 

이경숙은 가담 이틀 만에 체포되어 살인 행각과는 관련이 없다는 점이 참작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지존파 일당 전원은 1994년 10월 31일 서울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 사체유기, 인육 섭취, 사체손괴, 범죄단체 조직 및 가입죄, 특수강간 등이 적용되어 구형대로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이후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1995년 11월 2일 두목 김기환을 포함해 조직원 6명에 대한 사형 집행이 신속하게 이루어졌어요. 한동안 영광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영광 사람이라는 것을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고 하며, 영광 사람들이 객지에 나가면 살인자와 같은 동네에 산다고 해코지를 많이 당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존파는 이경숙을 제외, 전원 사형을 당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지금까지 지존파 살인사건을 알아봤습니다. 의도가 어떠한들, 범죄가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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